1821년 창간된 세계적인 영국 언론 가디언(The Guardian UK)이 자사의 모든 매체에서 모든 도박 광고를 금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세계적으로 격화되는 스포츠 베팅 업체들의 경쟁으로 스포츠 베팅 광고가 범람하는 가운데, 과도한 베팅 업체의 광고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베팅 광고가 청소년에 악영향을 끼치고 도박 중독을 유발한다는 비난을 수용한 조치로 보입니다.
스포츠 베팅 산업은 최근 몇 년 동안 매우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모바일 디바이스의 확산과 코로나19 팬데믹이 겹치며 스포츠 베팅 산업은 기존의 산업 구조에서 탈피하여 빠르게 온라인 스포츠 베팅의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이제는 스마트폰을 통해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토토사이트에 접속하여, 전세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경기에 손쉽게 베팅할 수 있습니다. 특히 2018년 세계 최대의 시장인 미국에서 스포츠 베팅을 합법화하며, 세계 스포츠 베팅 산업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베팅 업체들의 경쟁이 치열해졌고, 베팅 업체들은 다양한 미디어에 조 단위의 광고 비용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베팅 업체들은 신규 고객을 유치하여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고, 기존 고객이 꾸준히 베팅에 참여하여 수익을 유지할 수 있도록 광고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른 광고에 비해 베팅 업체의 광고는 광고 비용에 지출하는 단가가 높은 편입니다. 결국 베팅 업체의 광고로 막대한 지출을 올리고 있는 많은 미디어 매체들의 베팅 업체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영국 TV 채널의 매출에서 차지하는 경마 산업(마권업자)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는 중이며, 세계 최고의 SNS 어플리케이션인 틱톡(Tik-Tok) 역시 호주에서 스포츠 베팅 광고를 시험 중에 있습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매체를 뒤덮는 스포츠 베팅 광고에 반감을 품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스포츠 베팅을 포함한 도박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정적 고통을 유발하는 동시에 스포츠 베팅 중독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까지 야기합니다. 도박 중독으로 인해 개인과 가족, 나아가 사회 전체가 치르는 비용이 막대한 상황입니다. 전세계에서 도박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 비용이 가장 큰 국가로 꼽히는 호주는, 매년 약 250억 호주 달러(약 21조 원) 가량의 비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가디언은 영국을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정론지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2023년 6월 15일부터 자사의 모든 온·오프라인 매체에서 모든 도박 광고를 금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개인의 정신적 중독과 재정적 파탄을 야기할 수 있는 서비스를 광고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일이라는 이유입니다. 이들이 금지하기로 한 도박 광고는 다음과 같은 도박 콘텐츠를 의미합니다.
스포츠 베팅은 최근 업계의 대세로 자리잡은 토토사이트 같은 온라인 스포츠 베팅 업체까지 포함합니다. 복권(Lottery) 광고는 금지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복권은 구매자들의 구매 금액으로 사회 취약 계층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여 사회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구매 즉시 결과를 알 수 있는 즉시 추첨의 성격을 띄고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가디언 미디어 그룹((Guardian Media Group) CEO 애나 베이트슨(Anna Bateson)은 스포츠 베팅 광고가 사람들에게 정신적, 재정적 고통을 유발하고, 이것이 광범위한 사회 문제를 야기하는 ‘중독성 순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가디언의 많은 언론인들이 영국과 호주에서 도박 산업이 끼치는 악영향을 보도하여 사회적 문제의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말하며, “도박 광고 노출과 사람들의 도박 참여율 증가에는 분명한 상관 관계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스포츠 베팅 업체들이 사람들을 베팅에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타겟팅(Targeting), 즉 특정 사람들에게 특정 광고를 지목하여 노출시킬 수 있는 온라인 광고 기법이 문제라고 꼬집었습니다. 뒤이어 “독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제거하고 좋은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언론의 책무”라고 말하며 베팅 광고 금지로 줄어든 수익은 다른 방법으로 메울 계획이라 밝혔습니다.
가디언은 영국 정부가 제안한 도박 개혁안에 대한 의견도 밝혔습니다. 매년 영국의 도박 산업에 대한 산업 동향을 발표하는 ‘영국 도박 백서(Gambling White Paper)’는 베팅 업체들의 광고 금지 조치로 미디어의 매출이 감소하면 미디어의 공익 실현 능력이 저하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에 영국 정부의 개혁안이 기대에 미치지 못 한다며, 지금이야말로 본인들이 앞장서 베팅 광고를 금지할 적절한 시점이라 덧붙였습니다.
이번 조치는 언론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 하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됩니다. 가디언은 2020년에도 환경 보호를 위해 석유 및 가스 회사의 광고를 게재하지 않기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이번의 베팅 광고 금지 조치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책임감 있는 광고’를 실천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광고 정책을 검토할 것이라 강조했습니다.
가디언의 이번 조치는 과도한 스포츠 베팅 광고 논란에 선제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점에서 큰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영국과 호주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대다수가 넘쳐나는 도박 광고에 대해 거부감을 지니고 있으며, 도박 광고를 금지하는 조치에 대해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영국 정부는 베팅 업체가 미성년자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축구 스타나 TV 스타가 나오는 광고를 제작할 수 없도록 금지했으며, 청소년 보호를 위해 온라인 슬롯머신에서 2파운드(3,340원) 이상 베팅할 수 없도록 베팅 제한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이탈리아 정부와 벨기에 정부는 이와 같은 영국 정부의 조치에 환영의 뜻을 밝혔으며, 호주 역시 온라인 베팅에 신용카드 사용을 금지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더불어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인 잉글리쉬 프리미어 리그(EPL)는 2026-2027 시즌부터 선수들의 유니폼 전면에 베팅 업체의 광고 부착을 금지하기로 했습니다. 특히 EPL 유니폼의 베팅 광고 금지 조치는 큰 주목을 끌어 스페인이나 독일, 이탈리아 등의 다른 축구 리그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가디언 입장에서 매년 막대한 광고 비용을 지불하는 베팅 업체들의 존재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가디언과 옵저버(Observer), 가디언 위클리(Guardian Weekly)를 발간하는 가디언 미디어 그룹은 대표적인 영국의 정론지 매체로서, 균형 잡힌 편집권 독립을 위해 특정 기업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탓에 매년 막대한 적자를 기록 중입니다. 2016년 6,870만 파운드(약 1,148억 원)에 이어 2017년 4,470만 파운드(약 747억 원)의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광고에 비해 더 큰 광고 비용을 지불하는 베팅 업체들의 광고를 게재하지 않는 것은, 곧 가디언 미디어 그룹의 수익성 악화와 직결되는 큰 결정입니다.
가디언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꾸준한 적자 규모 감소와 스콧 재단의 후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디언은 5,700만 파운드(953억 원)의 적자를 기록한 2016년부터 온라인 트래픽을 늘리고 비용을 절감하여 적자 규모를 낮추기 위해 노력한 결과, 2019년에 20년 동안 이어진 적자 행진을 끝내고 80만 파운드(약 13억 원)의 영업 이익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데에는 스콧 트러스트 기금(Scott Trust Endowment)의 도움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가디언 미디어 그룹을 소유하고 있지만 편집권은 관여하지 않는 스콧 재단은 연간 2,500만 파운드(418억 원)에서 3,000만 파운드(500억 원) 가량의 순이익을 내며 가디언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지원해 왔습니다. 이를 통해 가디언은 매년 적자를 거듭하면서도 광고주 기업이나 정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저널리즘 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가디언은 모든 도박 광고를 금지하는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도박 광고 금지 조치로 당장 수입이 줄어들 상황에 처한 가디언은 광고가 아닌 독자의 직접적인 후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증가 중인 유료 구독자 수와 자발적인 기부가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줄어든 수입을 메우려는 것입니다. 가디언은 양질의 저널리즘과 도박 광고 금지 조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기부 및 후원을 요청했습니다. 더불어 모든 사람이 뉴스를 위한 비용을 지불할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며, 후원과 관계 없이 앞으로도 모든 사람이 뉴스를 무료로 읽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과감한 용단을 내린 가디언의 행보에 영향을 받을 다른 매체들의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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