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팅 업체 EPL 유니폼 스폰서 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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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팅 업체 EPL 유니폼 광고 제한

세계 최고 프로 축구 리그인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EPL) 구단 유니폼 앞면에서 스포츠 베팅 업체들의 광고가 사라집니다. 프리미어 리그는 4월 13일(현지 시간), 리그 소속 20개 구단이 선수들의 유니폼 전면에 스포츠 베팅 업체들의 광고를 금지하는 데 합의했다고 전했습니다. 다만 베팅 업체의 EPL 유니폼 스폰서 광고를 금지하는 부분은 유니폼 앞면 뿐이며, 뒷면이나 소매(Sleeve)에 부착하는 것은 허용합니다. 이번 조치는 베팅 업체와 구단의 계약 위반 소송을 피하기 위해 2025-26 시즌이 종료될 때까지 3년간의 유예 기간을 두기로 했으며, 2026-27 시즌부터 전면적으로 적용됩니다. 따라서 2026-27 시즌부터 사람들은 유니폼 앞면에서 더 이상 베팅 업체의 광고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걸어다니는 광고판, EPL 유니폼

세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프리미어 리그 구단들은 선수들의 유니폼에 특정 업체의 광고를 부착하는 방식(Shirt Sponsor)으로 수익을 창출해 왔습니다. 유니폼에 광고를 부착하는 업체는 경기 중계 내내 사람들의 눈에 브랜드를 노출시킬 수 있고, 선수를 근접 촬영한 사진이나 동영상을 통해 추가적인 노출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EPL 유니폼 스폰서는 구단들의 최대 수익원으로 꼽혀 왔습니다. 이번 2022-23 시즌 역시 노팅엄 포레스트(Nottingham Forest)를 제외한 19개 구단 모두 유니폼 스폰서 계약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노팅엄 포레스트는 보다 나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기 위해 계약을 진행하지 않은 것으로, 올해 1부 리그에 잔류할 경우 내년부터 새로운 스폰서 계약을 맺을 것으로 보입니다.

EPL 유니폼 스폰서를 진행하는 업체들의 면면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 달라졌습니다. 1990년대 EPL 유니폼 스폰서 광고를 차지한 업계는 맥주 회사입니다. TV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경기 중계를 시청하는 성인 남성들을 노린 광고였습니다. 맥주 회사의 뒤를 이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에는 통신 업체가 주된 스폰서였습니다. 당시 모바일 디바이스가 대중화되던 시기였고, 각 통신 업체는 EPL 유니폼 스폰서를 통해 인지도를 넓혀 왔습니다.

대표적인 업체는 스페인 통신 회사인 텔레포니카(Telefonica)가 운영하는 ‘O2’와 영국의 ‘보다폰(Vodafone)’입니다. O2는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아스날(Arsenal FC) 스폰서 및 미들즈브러(Middlesbrough FC) 스폰서로 10년간 EPL 유니폼 스폰서를 진행했습니다. 현재는 EPL 선수들의 일탈 행동이 브랜드 가치를 저해한다는 판단 아래 광고를 중단하고, 잉글랜드 럭비 국가대표팀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보다폰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 최고의 인기 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Manchester Utd. FC)와 광고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후 UEFA 챔피언스리그 스폰서가 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계약을 2006년 조기 종료했지만, 광고를 통해 인지도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이 밖에도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에버튼(Everton FC)을 후원한 ‘One2One’까지, 통신사는 EPL 유니폼 스폰서 광고의 큰 손으로 활약했습니다.

구단 유니폼 광고 업체 업체 분류
리버풀 FC 히타치 전자
아스날 FC JVC, SEGA 전자
아스톤 빌라 FC MITA 전자
맨체스터 시티 FC 필립스, Brother 전자
에버튼 FC NEC 전자
토트넘 FC HP 전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SHARP 전자
첼시 FC 삼성전자 전자
풀럼 FC LG전자 전자
뉴캐슬 FC NTL 전자
아스톤 빌라 FC NTL 전자
토트넘 FC AIA 금융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AIG 금융
리버풀 FC Standard Chartered 금융
뉴캐슬 FC Wonga 금융
< 과거 EPL 유니폼 광고를 진행한 업체 >

시기에 상관없이 꾸준히 EPL 유니폼 광고를 진행해 온 업계는 전자 회사와 금융 회사입니다. 최초로 EPL 유니폼 스폰서라는 개념을 도입한 리버풀(Liverpool FC)이 히타치(Hitachi)와 맺은 계약을 시작으로, 수많은 구단이 전자 회사 및 금융 회사와 유니폼 광고를 진행해 왔습니다. 80~90년대 세계 가전 시장을 점령한 일본 전자 회사의 대표격인 샤프(SHARP) 역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1982년부터 2000년까지 오랫동안 스폰서쉽을 맺었습니다. 이 기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전성기를 맞이하며 샤프는 만족할 만한 효과를 거뒀고, 광고 계약 종료 뒤 샤프의 영국 내 브랜드 파워가 감소했을 만큼 EPL 유니폼 스폰서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습니다.

한 번에 2개의 구단을 후원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진행한 곳도 있습니다. 버진 미디어(Virgin Media)의 전신인 NTL은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뉴캐슬과 아스톤 빌라 FC를 동시에 후원하여 하나의 기업이 2개의 구단을 후원한 첫 번째 사례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리그 명문 구단인 레인저스(Rangers FC)와 셀틱(Celtic FC)까지 후원할 만큼 유니폼 스폰서에 적극적이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모바일 시대가 찾아오고, 온라인 플랫폼 회사가 비즈니스의 중심에 올라서자 EPL 유니폼 스폰서 시장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베팅 업체의 EPL 유니폼 스폰서 진출

베팅 업체의 EPL 유니폼 스폰서 진출
< 2022/23 EPL 유니폼 스폰서 >

2000년대 이후 현재까지 EPL 유니폼 스폰서를 가장 많이 진행하고 있는 업종은 바로 온라인 스포츠 베팅 업체입니다. 유럽에서 손 꼽히는 메이저사이트는 모두 EPL 유니폼 스폰서를 눈독 들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02-03 시즌 풀럼이 유명 베팅 업체인 벳페어(Betfair)와 스폰서 계약을 체결한 이후, 베팅 업체와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는 구단은 매해 늘어났습니다. 현재 2022-23 시즌에는 프리미어 리그 20개 구단 중 8개의 구단이 베팅 업체와 스폰서 계약을 진행하고 있으며, 최근 5년간 매년 8~10개의 구단이 베팅 업체와 스폰서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작년인 2021-22 시즌만 해도 총 10개의 구단이 베팅 업체와 EPL 유니폼 스폰서 계약을 진행했습니다. 2022-23 시즌 프리미어 리그 유니폼 스폰서를 맡고 있는 베팅 업체 중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헐리우드벳 (Holywood Bets)2000년에 창립하여 남아프리카에 본사를 두고 아일랜드와 영국, 남아프리카 및 모잠비트 등을 대상으로 영업합니다. 매출 규모는 3천억 원 가량으로 축구를 비롯한 여러 스포츠 종목과 함께 경마와 국제복권까지 운영 중입니다.
  • W88필리핀에서 라이센스를 발급한 업체로 한국에도 진출한 해외 유명 베팅 업체입니다. 다양한 스포츠 베팅과 미니 게임, 온라인카지노 게임을 한국어로 서비스하며 원화(KRW) 결제도 가능합니다.
  • 스보탑 (SBOTOP)스보벳(SBOBET)과 같은 업체로 아시아 및 유럽에서 모두 라이센스를 받아 운영 중인 초대형 베팅 업체입니다. 축구 배당률에 특화되어 스보벳이 책정한 배당률을 사용하는 곳이 많습니다. 아시아에서 시작한 베팅 업체이지만 유니폼 스폰서를 통해 유럽에서도 인지도가 매우 높습니다. 원화 결제가 되지 않으므로 온라인카지노 에이전시를 이용해야 합니다.
  • Fun88영국에서 라이센스를 받아 중국과 베트남, 태국 등지에서 영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가입 및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유럽에서는 인지도가 낮고 평이 좋지 않아 유니폼 스폰서로 만회하려 하지만 중국 등지에서는 낙천당(樂天堂)이란 이름으로 이용자가 매우 많습니다.
  • 벳웨이 (Betway)유럽 등 여러 국가에서 많은 라이센스를 발급 받아 운영 중인 글로벌 베팅 업체입니다. 역사가 오래 되었고 성공적으로 운영 중이기 때문에 인터페이스 및 시스템이 편리하여 해외에서 이용자가 매우 많은 최고의 베팅 업체입니다.

작년 10개였던 업체가 8개로 줄어든 이유는 울버햄튼 원더러스(Wolverhampton Wanderers FC)와 크리스탈 팰리스(Crystal Palace FC)가 다른 업종의 업체와 스폰서 계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즌 크리스탈 팰리스를 후원한 베팅 업체 W88은 이번 시즌 풀럼을 후원 중입니다. 심지어 지난 시즌 2부 리그로 강등된 번리(Burnley FC)와 왓포드(Watford FC) 역시 베팅 업체와 스폰서 계약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포츠 베팅 업체는 유니폼 앞면 광고 뿐만 아니라 소매 광고에도 적극적입니다. 현재 유니폼 소매에 광고를 진행하고 있는 베팅 업체는 아스톤 빌라(Aston Villa FC)와 계약을 맺은 ‘카이윤(Kaiyun)’과 울버햄튼 스폰서인 ’12bet’까지 총 2곳입니다.

베팅 업체가 EPL 유니폼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하던 2000년대 초기만 해도 아직 계약 건수가 많지 않았고, 재정적으로 취약한 중소 구단에 머물러 있어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아스톤 빌라와 토트넘 등의 명문 팀이 베팅 업체와 스폰서 계약을 맺기 시작하자, 다른 EPL 구단 역시 베팅 업체와 속속 EPL 유니폼 스폰서 계약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EPL 유니폼 스폰서 계약을 맺은 베팅 업체의 개수는 2015-16 시즌 7개까지 늘어났고, 1년 후인 2016-17 시즌에는 무려 10개까지 늘어났습니다. 선수들의 유니폼 절반에 스포츠 베팅 업체의 로고가 박히게 된 것입니다.

유니폼에 직접 광고를 부착하지 않더라도, 구단들은 베팅 업체와 다양한 형태의 스폰서 계약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스날(Arsenal FC)은 스포츠 베팅 업체 보독(Bodog)과 2013-14 시즌 스폰서 계약을 맺은 데 이어, 2015-16 시즌 무려 3개의 베팅 업체와 파트너쉽을 체결했습니다. 3곳 중 하나인 패디 파워(Paddy Power)는 당시 신생 베팅 업체였는데, 아스날과의 파트너쉽을 통해 빠르게 인지도를 확보하고 영국과 아일랜드, 이탈리아 시장을 공략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맨체스터 시티를 제외한 모든 EPL 구단이 어떠한 형태로든 최소 1개 이상의 베팅 업체와 후원 계약을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구단 스폰서 업종 시작 종료 총 계약금 연간 계약금
아스날 아랍 에미리트 항공 항공사 2018 2024 2억 £ 4천만 £
아스톤 빌라 카주 (Cazoo) 자동차 판매 2022 600만 £
본머스 다파벳 (Dafabet) 스포츠 베팅 2022 2024
브렌트퍼드 Holywood Bets 스포츠 베팅 2019 2024
브라이튼 호브 알비온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금융 2019 2031 1억 £ 800만 £
첼시 3 (Three) 이동 통신 2020 2023 1.2억 £ 4천만 £
크리스탈 팰리스 신치 (Cinch) 중고 자동차 경매 2022
에버튼 스테이크 (Stake) 온라인 카지노 2022 1천만 £
풀럼 W88 스포츠 베팅 2022 2023
리즈 유나이티드 스보벳 (SBOBET) 스포츠 베팅 2020 600만 £
레스터 시티 FBS 온라인 외환 거래 2021 2024 1,200만 £
리버풀 스탠다드 차터드 금융 2022 2027 2.5억 £ 5천만 £
맨체스터 시티 에티하드 항공 항공사 2009 6,800만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뷰어 IT 2021 2026 2.35억 £ 4,800만 £
뉴캐슬 유나이티드 Fun88 스포츠 베팅 2020 700만 £
노팅엄 포레스트
사우샘프턴 Sportsbet.io 스포츠 베팅 2021 2024
토트넘 홋스퍼 AIA 금융 2019 2027 3.2억 £ 4천만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벳웨이 (Betway) 스포츠 베팅 2019 2025 6천만 £ 1천만 £
울버햄튼 원더러스 아스트로 페이 전자 상거래 2022 2023
< 22/23 EPL 유니폼 스폰서 현황 >

특히 아시아 베팅 업체의 약진이 돋보입니다. 2015-16 시즌 왓포드를 후원한 138.com,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West Bromwich Albion FC)을 후원한 TLCBET, 선덜랜드(Sunderland AFC)를 후원한 다파벳(Dafabet)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필리핀의 온라인 베팅 업체 다파벳은 EPL 유니폼 스폰서에 매우 적극적인 업체로, 2012-13 시즌 에버튼 및 웨스트브롬과의 계약을 시작으로 2013-14 시즌 아스톤 빌라를 거쳐 2015년부터 2년간 웨일즈 프리미어 리그의 타이틀 스폰서 자리를 꿰차기까지 합니다. 공격적인 마케팅은 현재 진행형으로, 2022-23 시즌에는 본머스(Bournemouth)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다파벳이 후원하는 업체는 1부 리그나 특정 국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2017-18 시즌만 해도 1부 리그의 번리, 2부 리그의 선덜랜드, 3부 리그의 블랙번 로버스(Blackburn Rovers FC), 스코틀랜드 1부 리그의 셀틱까지 광범위한 마케팅을 벌인 바 있습니다. 아시아 베팅 업체들의 목적은 영국 시장 공략이 아닙니다. EPL에 아시아 선수들의 진출이 늘어나며 아시아 지역의 EPL 시청자가 많아졌고, 현재는 EPL 시청자의 40% 가량이 아시아 지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온라인을 통해 EPL을 대상으로 한 스포츠토토 베팅까지 활발해지며 EPL 입장에서도 아시아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아시아 지역에서 EPL의 인기가 높아지자 아시아 베팅 업체들은 아시아에서 인기가 많은 EPL 구단을 후원하여 아시아 지역에서의 인지도와 매출 향상을 꾀하고 있습니다.

스포츠 베팅 업체가 빠르게 EPL 유니폼 스폰서를 장악한 데에는 금전적인 이유가 절대적입니다. 소위 ‘빅 클럽’이라 불리는 6개의 강팀(리버풀, 첼시, 맨시티, 맨유, 아스날, 토트넘)은 인기가 많은 덕에 굳이 베팅 업체의 후원을 받지 않아도 스폰서를 찾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실제로 6개의 빅 클럽은 지금까지 베팅 업체와 EPL 유니폼 스폰서 계약을 체결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중하위 구단은 사정이 다릅니다. 좋은 스폰서를 찾는 일은 1년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통상 스포츠 베팅 업체는 다른 기업에 비해 더 큰 금액을 제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중소 규모 구단은 이러한 제의를 뿌리치기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자본이 사들인 뉴캐슬의 경우 Fun88 스폰서 계약이 종료되더라도 다른 스폰서를 찾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등 위기에 처한 에버튼은 Stake.com 후원 계약이 종료될 경우 연간 1천만 파운드를 지원해 줄 새로운 스폰서를 찾아야 합니다. 아스톤 빌라 CEO 크리스티안 퍼슬로우(Christian Purslow)는 “중하위 구단 입장에서 다른 스폰서보다 2배의 금액을 제안하는 베팅 업체의 후원을 거절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베팅 업체의 EPL 유니폼 스폰서가 중하위 구단에 치우쳐 있고, EPL 유니폼 스폰서 중 베팅 업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에는 이러한 경제적인 이유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BBC 보도에 따르면 EPL 구단 8곳이 스포츠 베팅 업체와 맺은 전체 계약 규모는 연간 6천만 파운드(약 974억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EPL 역사상 특정 업종이 이렇게 유니폼 광고계를 장악한 사례는 없을 정도로 베팅 업체의 스폰서 규모가 막대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늘어나는 자성의 목소리

늘어나는 자성의 목소리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점차 베팅 업체의 광고에 대한 우려와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베팅 업체들이 개별적인 구단 후원을 넘어 리그 전체의 타이틀 스폰서 자리까지 노리자, 베팅 업체의 후원 계약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이는 2015-16 시즌 영국 바클레이(Barclays) 은행의 프리미어 리그 타이틀 스폰서 계약이 종료되었을 때 절정에 다다르고 맙니다. 바클레이 은행과의 계약 종료 후, 많은 베팅 업체들은 프리미어 리그 타이틀 스폰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나섰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영국인들은 프리미어 리그가 돈 앞에 무릎을 꿇어선 안 된다며 비난했고,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의 고결한 정신을 지켜야 한다며 베팅 업체의 타이틀 스폰서를 반대했습니다. 결국 당시 EPL 사무총장인 리처드 스쿠다모어(Richard Scudamore)는 “아무나 타이틀 스폰서가 될 수는 없다”며 베팅 업체의 타이틀 스폰서 가능성을 일축하며 진화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베팅 업체의 유혹에 무릎을 꿇은 곳도 있습니다. 막대한 후원 금액에 눈독을 들인 잉글랜드 풋볼 리그(EFL)는 영국의 베팅 업체 스카이벳(Skybet)과 리그 타이틀 스폰서 계약을 맺게 됩니다. 프리미어 리그의 하위 리그이자 2~4부 리그를 통틀어 72개의 구단이 소속된 EFL이 2013년부터 2019년까지 베팅 업체에게 타이틀 스폰서를 맡긴 것입니다. EFL 회장 릭 페리(Rick Parry)는 “베팅 업체의 스폰서 계약은 각 구단에 연간 4,000만 파운드의 가치를 제공한다”고 두둔하기도 했습니다. 프리미어 리그 만큼 엄청난 규모의 중계권 계약을 맺을 수 없는 이상, 베팅 업체의 스폰서 계약은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스코틀랜드 1부 리그인 스코티쉬 프리미어쉽(Scottish Premiership) 역시 영국의 온라인 스포츠 베팅 업체인 래드브록스(Ladbrokes)와 타이틀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러한 베팅 업체들의 ‘돈 폭격’ 앞에 위기감을 느낀 프리미어 리그는 2016-17 시즌부터 리그 타이틀 스폰서 자체를 폐지하기로 결정합니다. 미국 프로 농구(NBA)나 프로 야구(MLB)처럼 리그 이름에 스폰서 업체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The Premier League’라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리그 타이틀 스폰서 제도를 유지하는 이상 베팅 업체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리그 타이틀 스폰서 제도 자체를 없앨 만큼 베팅 업체들의 돈 폭격이 무시무시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프리미어 리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선수들의 유니폼 전면에 베팅 업체의 광고를 금지하기까지 합니다. EPL 중계를 접하는 미성년자들이 스포츠 베팅 중독에 빠질 위험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최근 영국에서 젊은이를 중심으로 도박 중독 비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것 역시 EPL 유니폼 스폰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런던 루이스햄(Lewisham) 지역의 뎁퍼드(Deptford)처럼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은 미성년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도박 중독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EPL 유니폼 스폰서 제한 조치는 도박 천국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영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위기감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사실 베팅 업체 광고가 범람하는 현재의 상황을 모두가 손 놓고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영국 정치인들 사이에서 1991년 TV 담배 광고를 전면 금지한 것처럼, 베팅 업체 광고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지 제법 오래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동당의 경우 집권하게 되면 베팅 업체의 EPL 유니폼 광고를 법적으로 금지하겠다는 공약까지 내걸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보수당이 도박 산업 규제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세수(稅收) 감소를 이유로 반대에 미온적인 탓에 도박 규제 법안은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영국이 도박에 비교적 관대한 분위기인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런던 시내 곳곳에 수많은 카지노가 자리해 있고, 공중파 채널인 ITV는 밤 12시 이후에는 시청자가 참여할 수 있는 도박 프로그램을 방영할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영국은 세계 스포츠 베팅 산업의 중심입니다. 영국의 도박사들이 월드컵과 같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에 책정한 배당률은 전세계 베팅 업체들의 배당률 산정 기준으로 자리 잡았으며, 스페셜 베팅 등의 다양한 베팅 옵션을 설정하는 것 역시 영국의 스포츠 베팅 업체입니다. Bet365 등 세계 최고의 온라인카지노 업체들이 영국을 본사를 두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수많은 국내 토토사이트 역시 영국에 기반을 둔 해외 베팅 사이트의 배당률을 참고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사설토토 이용자들 역시 영국 베팅 업체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베팅 업체의 유니폼 스폰서 금지가 갖는 의미

베팅 업체의 유니폼 스폰서 금지가 갖는 의미

베팅 업체가 EPL 유니폼 스폰서를 진행할 수 없도록 막은 이번 조치는 전 구단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AP 통신에 따르면 유니폼 전면에 베팅 업체의 광고를 금지하기로 한 것은 영국 스포츠 단체 중 프리미어 리그가 최초입니다. 과거 뉴캐슬이 대부 업체 웅가(Wonga)와 유니폼 광고 계약을 맺고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은 적이 있긴 하지만, 일시적이었기 때문에 리그 차원에서 문제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베팅 업체의 EPL 유니폼 스폰서 문제는 전 구단이 머리를 맞대고 합의에 나섰다는 점에서 더욱 긍정적입니다. 도박 산업 규제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번 조치를 바탕으로 도박 산업 규제를 위한 목소리를 더욱 높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EPL 리그 관계자는 “리그와 소속 구단, 정부의 광범위한 협의에 따라 결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루시 프레이저(Lucy Frazer) 영국 문화부 장관은 “대부분의 성인이 별다른 문제 없이 베팅을 즐기고 있지만, 축구 선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롤 모델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면서 EPL의 이번 조치를 환영했습니다. 또한 “각 스포츠 단체와 지속적으로 협력해 젊은 스포츠 팬들을 위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계속 펼쳐나가겠다”고 언급했습니다. 축구계에서 모든 베팅 업체의 광고를 퇴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빅 스텝(The Big Step)’ 캠페인의 제임스 그림(James Grimes) 역시 환영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는 “소매 광고가 남은 탓에 완전하진 않지만, 중요한 한 발을 내디뎠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어 “전 세계 수십억 명이 지켜보는 EPL 유니폼 만큼 광고 효과가 큰 곳은 없는데, EPL 구단이 베팅 업체의 후원으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라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과거 스포츠 베팅 업체와 유니폼 스폰서 계약을 맺은 바 있는 브라이튼 호브 알비온(Brighton & Hove Albion FC) 구단주 토니 블룸(Tony Bloom) 역시 이번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는 “베팅 업체와의 계약으로 많은 돈을 번 것은 사실이지만, EPL 유니폼 스폰서에 베팅 업체가 참여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베팅 업체가 가장 큰 돈을 후원하기 때문에 구단 입장에서 거절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라는 현실적인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전 영국 보수당 대표인 이언 스미스(Iain Duncan-Smith)는 도박 중독의 폐해를 막기 위해 더 강력한 규제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도박에 관대하고 자유로운 나라가 영국”이라고 말하며, 프리미어 리그를 넘어 사회 각계 각층의 힘을 모아 도박 산업을 규제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FA컵 대회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을 관리하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FA) 또한 축구계로부터 베팅 업체를 몰아내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축구 협회는 선수 본인이 소속돼 있는 구단의 경기에 베팅하는 것을 금지해 왔는데, 2014-15 시즌부터는 전세계 모든 축구 경기로 대상을 넓혔습니다. 아울러 본인이 알고 있는 정보를 제3자에게 전달하여 간접적으로 베팅에 참여하는 것 또한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2017년 6월로 종료된 베팅 업체 래드브록스와의 스폰서 계약을 끝으로 어떠한 베팅 업체와도 스폰서 계약을 맺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EPL 각 구단이 이번 조치에 자발적으로 가담한 만큼, 도박 중독의 위험성을 공유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베팅 업체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과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2006년 보다폰 스폰서 계약이 종료되며 새로운 스폰서를 찾으려 한 적이 있습니다. 에티하드 항공 및 LG전자 등 4개의 기업과 협상을 벌이고 있었는데, 베팅 업체 맨션(Mansion)이 등장하여 4년간 7,000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제시하고 나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맨유와 손 잡고 공동 소유의 인터넷 게임을 제작하자는 제안으로 맨유를 흔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맨유는 맨션의 제시 금액보다 낮은 4년간 5,600만 파운드를 제시한 AIG 보험과 계약하며 맨션을 거절합니다. 구단의 이미지 저하를 막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각 구단이 이렇게 돈의 유혹을 뿌리치고 건전한 스포츠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유니폼 광고 제한 조치의 한계

그러나 베팅 업체의 EPL 유니폼 스폰서를 금지하기로 한 이번 조치가 제한적 효과에 머물 것이라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유니폼 전면의 광고를 금지했을 뿐, 뒷면이나 소매에 광고를 부착하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넉넉한 재정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중소 구단을 배려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금지하긴 했지만, 소매 광고를 남겨 놓았기 때문에 2026-27 시즌부터 베팅 업체의 소매 광고가 급증할 것이라 게 그들의 예상입니다.

베팅 업체를 표적으로 한 각종 규제가 늘어나는 것에 대한 걱정도 나옵니다. 영국의 베팅 업체들이 참여한 도박위원회(Betting & Gaming Council, BGC)는 “매달 베팅에 나서는 영국인 2,250만 명 중 압도적 다수가 중독 위험 없는 안전한 베팅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도박 중독 문제를 겪는 영국인은 성인 인구의 0.3%에 불과하여 다른 국가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라며 베팅 업체를 옥죄는 각종 조치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베팅 업체의 후원금으로 투자를 지속할 수 있었던 중소 구단은 당장 2026-27 시즌부터 새로운 스폰서 업체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됐습니다.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고 싶은 기업들이 줄 서있는 빅 클럽과 달리, 중소 구단은 매년 스폰서 업체를 찾는 것이 1년 농사를 결정짓는 큰 문제입니다. 스폰서 업체를 찾더라도, 구단 운영에 충분할 만큼의 금액을 후원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탄탄한 재정적은 질 좋은 선수를 발굴하여 리그 상위권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이므로, 이번 금지 조치로 인해 중소 구단이 더욱 어려움을 겪고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활발한 순위 경쟁이 리그 전체의 발전을 이끌어내는 것이 사실인 만큼, 베팅 업체의 EPL 유니폼 스폰서 금지 조치가 앞으로 EPL 전체의 향방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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